한국 델파이 동호회 델마당

30대까지 문학을 사랑하고 도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는 멀고먼 추억이 되어버렸네요.
아래의 글은 저의 마지막 미완성 작품인데요, 지금 다시 읽어도 그런데도 봐줄만 한 듯 싶습니다.
델파이를 사랑하고 그 가능성이 점점 발전하기를 원하였지만 이제는 C#나 자바를 기웃거려야하는 처지에 있네요. 하하...

아래글을 십여년만에 다시 읽으니 저의 청춘이 새삼 느껴지는 것 같아서요.
다른 분들도 함께 즐겼으면 해서 한번 올려봅니다.

아래는 제가 끝까지 완성하지 못한 단편소설입니다. 글을 쓰다가 중간에 신장결석으로 병원에 입원하였고 그 다음에는 그 고통의 통증에 놀라서 몸관리 하느라 어느덧 일년이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아래의 내용들은 저의 단편적인 경험들을 모두 짜집기 한 것입니다. 사실도 있고 거짓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보면 조금 유치한 구석이 많이 있습니다. 일단 문장의 표현부터가 오에 겐자부로의 '절규'를 많이 모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도입 부분은 '분노의 포도'를 거의 표절하고 있습니다.

언제가 되어야 글을 완성할 수 있을까를 한 번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이 글은 나의 가장 비겁하고 수치스러웠던 기억의 단편들을 꺼내서 조각조각 분해하는 의도로 기획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과거를 극복한다는 것은 그보다 더 큰 용기로 세상에 도전을 해야 한다는 것을 최근에야 깨닳았습니다. 이 글이 완성이 되든, 그렇지 않든... 어쨌든... 그 부끄러움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목

신문지를 50번 접으면

마른 흙먼지 바람이 도로 밑마닥을 휩쓸었다. 무거운 돌가루는 이리저리 밀려다니며 고정되지 않았다. 그것은 노란색 중앙선 위를 춤추듯 밀려다니며 위태롭게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보다 가벼운 가루들은 뿌옇게 일렁이다 도로변으로 밀려 나가고는 메마른 흙더미 속으로 사라져갔다. 건조하고 다소 쌀쌀한 바람은 불어오면서 동시에 방향을 바꾸었다. 음식집의 입간판이 위태로운 소리로 뒤뚱거리며 간절히 주인을 찾았다. 경사진 시멘트 바닥에는 크기와 높이가 제각각인 파란 플라스틱 화분 여러개가 모여 있었다. 말라 비틀어진 풀 쪼가리가 바닥에 바싹 엎드려 있었고, 어쩌면 방울토마토인 듯, 녹슨 쇠막대에 조잡한 끈으로 단단히 묶여진 채 한껏 오그라진 몸뚱이를 간신히 세워 놓은 것도 있었다. 태양은 12시를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42번 국도 수인산업도로는 계절을 바라보지 않았다. 수많은 차량과 음식점이 수직으로 마주보며 끊긴 듯 이어졌고, 항상 흙먼지가 날렸다. 도로에는 함몰된 구멍과 갈라진 틈과 색바랜 도료가 끊임없이 흙먼지를 달래고 있었다. 우리는 10여 분 째 20톤짜리 덤프트럭을 뒤따라가고 있었다. 남사장은 육중한 덤프트럭의 진동과 소음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제 다왔다 싶으면 다시 속도를 냈고, 그때마다 덤프트럭의 반쯤 열려진 뚜껑 사이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몰라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대체 밥을 먹기 위해 어디까지 가야 한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남사장은 50대 중반의 마른 체구에 머리는 반백이었고, 다소 광대뼈가 튀어나와 적잖이 완고한 인상을 보였다. 때때로 그는 여우가 사냥감을 노리듯 하는 타인과의 거리감으로 부자연스런 긴장감을 유발시키곤 하였다. 또한 목소리가 상당히 가냘프고 간들어졌는데 어쩌다 과장된 공손함을 불현듯 표현 함으로 해서 사람을 종잡을 수 없게 만들었다. 승용차는 미끄러지듯 도로를 벗어나 한적한 음식점 앞 주차장 근처에서 갑자기 속도를 줄였다. 나와는 동년배인 듯한 한과장이 먼저 뒷자리에서 내렸다. 그는 뒤이어 내린 나를 내버려두고 남사장이 주차하는 것을 어슬렁거리며 지켜봤다. 우리가 도착한 식당은 달려온 시간에 비례하여 굳어진 점심에 대한 환상을 무참히 짓밟는 곳이었다. 멀쩡한 가정집 기와지붕 앞에 굳건히 매달아 놓은 하늘해장국집이라는 간판은 오래전에 용도 폐기된 일반주택의 싸늘한 주검을 낙인찍어 놓은 듯 싶었다. 어쩌면 그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색다른 용도에 설치된 억지주장의 간판으로도 보였다. 나는 현관 입구에서 남사장이 한과장과 함께 걸어오는 것을 잠시 기다렸다. 아직은 춥기까지한 2월 중순의 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쳤다.

조각난 나무들이 정사각형의 틀 안에서 중심을 향하는 듯한 모양으로, 다시 그 수많은 정사각형의 모양이 사방연속문양으로 나무 고유의 무늬를 간직한 채 타일 조각처럼 다닥다닥 천정에 붙어 있었다. 그것은 니스칠로 약간씩 번들거렸지만, 실은 그 어두운 명암의 질감 자체 때문에 실내를 더욱더 무겁고 칙칙하게 억압하고 있었다. 도로를 마주보는 방향으로는 벽면의 반 정도가 어린아이 높이 만한 아랫벽을 남겨두고 나무 창문으로 줄줄이 연결되어 있었으며 그 바깥에는 방풍용 비닐이 온통 뒤덮어 버린 상태였다. 나는 갑자기 80년대 초등학교 시절의 까닭모를 불안과 연민으로 두더지처럼 흙속에 파묻혀 지내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계절의 순환을 망각한 채 어둡고 칙칙한 그늘의 모퉁이를 하는 일 없이 배회하던 외로움의 나날들이었다. 식당 안은 현실과 과거의 기묘한 삶의 이중주가 어디론가 흘러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기 해물탕이 정말 좋아. 이소장, 해물탕 좋지?” 남사장이 자리에 앉자마자 나에게 물었다. 그는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자신만의 삶에 나 하나쯤은 여유롭게 끼워넣은 듯 싶었다. 싫어한다는 대답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과장이 화장실을 향해 사라지고 남사장이 다소 어색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신문을 집어들었다. 나는 식당의 거실 한가운데에서 과거 어느 시간대의 또다른 내가 바닥에 누워 천정의 나무 문양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이는 안개처럼 내려지는 어둠의 조각들이 니스칠로 인해 반짝거리고 있는 것을 빈둥거리며 바라보는 중이었다. “전에 내가 말한거 말이야, 어때 알아는 보았어?” 남사장이 신문을 접으며 말했다. 나는 컵에 물을 따르면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눈부심 속으로 갑자기 사라지는 과거의 아이를 망령처럼 바라 보았다. “예, 알아보고는 있는데요 쉽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남사장이 이마에 주름살을 세우며 애타듯이 말했다. “아니 그게 뭐가 어렵다고 그래. 난 대체 이해가 안되네.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게 그렇게 힘드나?” 지금은 열명 남짓한 부하 직원을 거느린 어엿한 중소 엔지니어링 업체의 사장이지만, 그도 한때는 기계를 깎는 기술자였다. 선반과 밀링, 드릴과 같은 기계작업은 정밀함과 안전성을 가치로 하지만 소프트웨어는 전혀 다른 복잡성과 유지보수를 관점으로 설계되어진다. 한 분야의 일반적인 경험이 새로운 곳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상식이란 얼마나 다른 저마다의 개성으로 뜀박질을 하는지 모른다.

“이번달까지는 어떻게든 구현해 보겠습니다. 그나저나 시운전은 언제죠?”

“나도 몰라. 여기 한과장에게 물어봐. 지금 설계하고 있으니까.”

어느새 한과장이 방석을 깔고 앉아서는 뭐냐는 듯이 쳐다 보았다.

“아니 아직 설계도 안 끝났나요?”

“놀라긴. 그거 금방 끝나. 우리가 기계 하루 이틀 만드나. 기존에 있던 도면에서 약간만 수정하면 되는데 뭐. 그렇지 한과장?”

한과장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 예…” 그는 순종적인 성실함으로 두리뭉술 말려있는 듯 싶었다. 태광 엔지니어링이라는 글씨가 노랗게 박힌 업무용  검청색 점퍼가 소박하게 잘 어울렸다. 우리는 잠시 말을 잃었다. 주방 쪽에서 슬리퍼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간간히 어지럽게 들렸다. 나는 자꾸만 졸음처럼 밀려오는 과거의 향수에 저항하고 있었다. 업무의 연장선에서 현실의 긴장감을 유지해야만 했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컵을 만지작 거리다가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거실 중앙에 놓여있는 가스난로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것은 최신 코팅 기술의 고급스런 번쩍거림과 다이나믹한 곡선의 날렵함으로 부품 하나하나가 정밀하게 조립되어 있었다. 따듯함의 기능이 극적으로 과장되게 보장받고 있었는데 어둡고 음산한 80년대의 기운이 가득한 이 식당안에서 유일하게 구분되어지는 현실의 끈이었다. 나의 어린 망령은 이후 두 번 다시나타나지 않았다.

오래된 대리석 계단에 달라붙은 껌딱지는 좀 더 큰 찌든 때처럼 보였다. 지하철 입구의 계단을 밟고 올라오니 신선한 공기가 아닌 차가운 섬뜩함이 느껴졌다. 높이 솟은 빌딩들 사이로 고막을 울리는 바람 소리가 휘몰아친다. 반들거리는 면과 직선, 수직과 거대한 곡선이 8차선의 아스팔트를 중심으로 강철과 유리로 포장되어 있다. 설계된 구조에 갇힌 공간들이 차가움을 밀어내어 보도는 더욱더 황량해진다. 나는 횡단보도 앞에 서 있다. 낮선 정지감에 익숙하지 못한 나의 시선은 잠시 고정될 곳을 찾지 못한다. 바닥에 붙은 수많은 껌딱지가 눈에 들어온다. 갑자기 허리를 굽혀서 그것을 핥고 싶어진다. 깜짝 놀란 나는 고개를 든다. 내 심장의 두근거림이 무수히 많은 기포처럼 부풀어 오른다. 정지해 있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고통처럼 느껴진다. 마침내 파란불이 켜지고 행인들이 도로로 쏟아져 들어간다. 각자의 개성을 갑옷처럼 껴입은 그들은 저마다의 섬처럼 이동한다. 해는 낮은 각도로 발밑에 밟혀서 차마 미안한 듯 얼어붙은 아스팔트를 붉게 물들인다. 핸드폰이 울렸다. “어디야, 아직 멀었어?” 나는 이제 거의 다 왔다고 대답한다. 노트북 가방을 짊어맨 어깨의 통증이 심하게 느껴진다. 미영이는 알았다는 짧은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구르다 깎인 차돌 같았고 불꺼진 방에 혼자 남아서 독백하는 대사 같았다.

강남에 있는 유명 컴퓨터학원 강사 자리가 하나 비어 있다고 전화가 온 것은 작년 여름이었다. 전화를 준 선배는 내가 첫 입사한 SI 개발회사의 팀장으로 있었는데 몇 년 후 지긋지긋하다며 사표를 내고는 사라졌다. 그의 개발 스킬을 그대로 따랐던 나로서는 서운한 감이 적지 않았다. 연락을 한두 번 해줄만도 한데 도통 소식조차 들을 수가 없었다. 거의 5년이 다 되어서야 목소리를 듣게 되었으니 얼굴은 까맣게 잊혀진게 당연했다. “누… 누구세요?” 갑자기 반말로 시작하는 통화가 어느덧 익숙하지 못하게 될 정도로 나는 나이를 먹은 상태였다. 기억의 함지박에서 과거에 몸담았던 회사와 이름을 떠올리자 그제서야 하얗게 반가움으로 포장되어졌다. 선배는 나에 대해 어느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현재는 데이터베이스 구축업무인 SI에서 벗어나 영상처리와 자동화시스템 개발 분야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으며 개인적으로는 CPU의 SSE 명령어를 이용한 MPEG 압축 알고리즘 분석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는 것까지 소상히 알고 있었다. 아마도 개발 동호회 웹사이트에 내가 올려 놓은 강좌나 질문/답변란의 글들을 읽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네가 필요하지. 객체지향적인 감각이 없으면 말짱 헛거라는 거 너도 잘 알잖아. 스레드나 소켓까지는 가지도 않아. 그냥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느낌 같은 거를 말해주면 되는거야. 6개월 계약직인데 부담되지도 않잖아. 물론 실무 경력에는 약간의 마이너스가 되겠지. 나? 나는 지금 학교에 있어. 아니, 그건 아니고 박사과정 마무리에 있어.” 선배의 종적에 관한 미스터리는 부러움의 앙금처럼 가라앉았다. 다소 의기소침해진 나의 마음이 잔잔히 빠져나가는 것을 눈치챘는지 선배는 “내일 오전 10시에 무조건 학원으로 나와 알았지?”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날밤이 늦도록 적지않은 망설임이 시계추처럼 똑딱거렸다.

프로그래머에게 있어서 학원강사 자리란, 특히 경력 10여년의 중,고급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난감한 문제였다. 차라리 은퇴하여 치킨집이나 PC방을 차린다고 하면 모를까, 혹은 선배처럼 학위 공부를 하면서 강사 생활을 병행하는 것과도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손쉬운 자리인 만큼 미래에 대한 치열함이 부족하고 이미 가지고 있는 기술을 소모할 다름이었다. 날카로움이 사라진 칼날이 자를 수 있는 의미 있는 내일에 과연 희망을 걸 수가 있을까? 아니, 아니, 이러한 강박적인 불안함은 어쩌면 순간적인 것일 수도 있다.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일지도 모른다. 편안하고 안정적인 학원강사 생활을 한번쯤 해본다는 것이 현업에서 도태된다는 씨앗의 증표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느새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지고 있었다. 이것저것 마구 쳐넣어 정체를 알 수 없이 뒤범벅이 된 스프에 몇 숟갈 떠먹다 말고 뚜껑을 닫아버린 것처럼, 나는 생각의 끈을 집어던지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음날 나는 부엌의 식탁 의자에서 뜨거운 아침 햇살에 산란되는 먼지기둥이 대각선으로 깎여진 채 천천히 회전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의식은 어떤 주파수가 공진되어 증폭되는 한계의 순간에 한동안 정지한 것 같았다. 학원강사라니…. 나는 불만의 의심을 한 움큼 입안에 담고는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불안한 떨림의 그림자가 이제 막 나를 덥치기 직전에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곧이어 ‘밥은 먹고 가야지!’라는 어머니의 야단스러운 목소리가 내 등을 후려쳤다. 경박한 나의 발걸음은 서두르는 내 마음보다 앞서 나가고 있었다.

학원은 번화한 도시의 하늘을 향한 구성원으로 높이 솟은 12 층짜리 새하얀 콘크리트 건물이었다. 강남역에서 조금 떨어진, 그러나 대로변 안쪽으로 약간 구석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보기와는 다르게 그곳은 놀랍도록 넉넉하고 평온한 공간이 숨겨져 있있다. 마치 사과 껍질의 단단한 경계에 과육이 드러나는 부분처럼, 건물의 양지바른 옆쪽은 아파트 단지의 작은 초록빛 정원이 이어졌고 앞쪽에는 소문난 음식점인 듯한 3층 짜리 건물의 드넓은 주차장이 놓여져 있었다. 이 모든 것은 하나의 거짓말처럼 보일 듯한 신비스러운 면이 분명 있었다. 그리고 이처럼 고급스러운 공간의 구획은 차마 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는, 밀집된 경쟁에서 승리한 자들의 거대하고 비밀스러운 우아함이라고 느껴졌다.

학원에서 나는 선배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예상외로 담당자는 선배에 대해 전혀 무지했다. 나는 마치 토끼 몰이를 당하듯이 차장, 부장, 부원장의 순서로 정신없이 끌려다니며 면접을 보아야 했다. 그 마지막 관문이었던 부원장에 의해 비로소 선배의 이름이 흘러 나왔지만 그와 어떠한 관계인지는 역시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모든 긴장이 풀려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줄 알고 행정실 한 가운데 놓여 있는 둥그런 테이블에 앉아 있을 때였다. 머리를 짧고 반듯하게 깍은 30대 초반의 차장이 나에게 살며시 웃으면서 다가오더니 6개월 짜리 계약직 근무 계약서를 마치 상수도 요금 영수증처럼 건네 주었다. “사인하시죠!” 너무나 잘 짜여진 시나리오에 갇혀버린 나로서는 학원측의 당연하다는 듯한 분위기에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나의 학원 강사 생활은 시작되었다. 처음 한달간은 익숙하지 못한 행정 업무에 고민되는 부분을 채워 넣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현업에서 프리젠테이션을 종종 해보았기 때문에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까다로운 클라이언트의 눈치와 비위를 맞추지 않아서 편하기까지 했다. 다만 학습능력의 차이가 무척 다양하여 그 기준을 찾느라 애를 먹었는데, 이 고민은 마지막까지 타협하지 못하는 나만의 문제가 되었다.

어쨌든 뒤쳐진 아이들은 당분간 나의 애교 섞인 양심의 무게추에 실려져 가까운 호프집에서 돈가스 안주라는 약간의 경제적인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70석 규모의 전문 호프집은 근처의 학원생들에 의한 2차 집결지라도 되는 듯 했다. 항상 단체손님이 북적였고 테이블을 붙이느라 소란을 떨었다. 때때로 리눅스니 알고리즘이니 하는 설익은 컴퓨터 용어들이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와 놀라곤 했는데, 부근에 대형 컴퓨터 학원이 한군데 더 있다고 함께 온 원생이 알려주었다. 샴페인이 터지고 생일축가가 울려퍼지는 고막의 사치스런 떨림이 나의 20대를 전율스럽게 추억하도록 만들었다. 특별한 날을 기념하는 행사와 더불어 한 주의 마지막 강의가 끝나는 금요일 저녁의 떠들썩한 맥주파티는 이처럼 어느새 당연한 의식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날도 금요일 저녁이었고 저녁 10시가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학원생들과의 맥주 기운이 얼큰하게 달아 올라 있었다. 나는 지하철에서 내려 어두컴컴한 지하보도를 걷고 있는 중이었다. 인적이 드문 곳이었고 상점하나 없는, 그야말로 좁고 길게 이어진 지하대피소의 삭막한 콘크리트 터널과도 같은 곳이었다. 누군가 등 뒤에서 또깍또깍 구둣발 소리를 내며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오고 있었는데 등골이 오싹했다. 뒤돌아보니 그것도 여자였다. 나는 내심 두근거리는 발걸음을 조금씩 줄여가면서 뒤따라오는 여자가 내 앞을 질러가길 기다렸다. 그런데 여자는 내가 서면 따라서 섰고 내가 걸으면 따라서 걸었다. 몇 번이고 같은 상황이 반복되자 이번에는 내가 뒤돌아서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저기요!” 갑자기 나도 모르게 터져나온 이 단 한마디의 인사말이 그녀에게 날카로운 비명소리를 지르게 하면서 황급히 뛰쳐나가게 만들었다. 나는 이보다 더 겸연쩍을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아무도 없는 터널에서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지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 이상한 일이 있은 후 3주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출근을 하기 위해 전철역에 서 있는데 한 낯선 여자가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가벼운 목례를 하는 것이었다. 너무나 순간적인 일이어서 나는 여자의 시선이 내 등 뒤의 누군가를 향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짐작에 뒤돌아 보았다. 하지만 그곳은 전철의 반대편 승차장일 뿐이었다. 내가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빤히 쳐다보자 이번에는 시치미를 뚝 떼고는, 저만치 뒤에 가서 가방을 정갈히 앞단에 모으고는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나는 사실 이 두 가지 사건이 하나의 인과관계가 있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몰랐던 사실까지도 미영이의 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녀는 내가 근무하고 있는 컴퓨터 학원의 바로 아랫층에 있던 시사어학원의 영어 강사였다. 강사생활이 처음이라 수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기억해내는데 서툴렀던 나는 학원 건물의 지하 식당에서 심심치 않게 스쳐지나갔던 그녀를 좀처럼 알아보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녀는 몇 달전 바로 그 전철역의 지하터널에서 한 치한에게 몹쓸짓을 당하여 정신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비록 우리동네 였지만 감시카메라가 망가진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건장한 사내도 밤길에 걸으면 심장박동수에 영향을 줄 만큼 외지고 음산한 곳이었다. 미영이는 웃으면서 그 전에도 몇 번 내 등 뒤를 밟은 적이 있다고 실토했다. 무슨 사람이 그렇게 눈썰미가 없냐고, 타박을 하면서 그날 비명을 질렀던 것이 조금 미안하여 먼저 눈 인사를 했다고 미소지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전철역 승강장에서 만나 인사를 하고 함께 퇴근을 하는 사이가 되었다. 학원의 5층 간이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을 함께 먹는 모습을 보고서 원생들이 연애한다고 짓궃게 놀려대기도 하였다. 부정하긴 어려웠지만 어쨌든 나는 부드러운 양탄자 위를 걷는 듯한 감정의 밑바닥을 경험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간간히 날라오는 그녀의 문자메시지가 어느새 단단한 구속감의 걸개와 같이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요즘 나는 실리콘을 이곳 저곳에다 마구 쏘고 다녀. 접착제도 되고 방수도 되니까 조금만 금이 가거나 틈이 벌어지면 갖다대고 쏘는 거지. 처음에는 정말 사용하기 불편했어. 손에는 덕지덕지 붙지, 제대로 모양은 안 나오지… 그런데 지금은 말이야, 그 실리콘으로 집까지 지을 수 있을 것 같더라구. 그렇지 않어? 바로 지금 너의 감정이 꼭 그럴거라고 생각되는데 말이야. 연애? 그거야 말로 모든 과대망상의 유전적인 근원이지.”

20대 중반에 결혼을 해서 초등학교 자식을 둘이나 두고 있는 동창생이 술자리에서 하는 말이 그랬다. 그녀로부터의 문자 메시지를 받고서 정해진 시간에 나가봐야 한다고 미리 양해를 구하면서부터 녀석은 조금씩 비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미 8년전에 파혼을 하는 쓰라린 실연을 겪은 상태였지만 그 비밀스러운 내막은 동창생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성난 파도와 같았고 새하얀 백지장과도 같았던, 그 이해할 수 없이 잠이 존재하지 않았던 몇주간의 고통스러운 몸부림이, 나로 하여금 자기 폐쇠적인 0과 1의 구조적 우아함에 빠져들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나는 남자와 여자가 얼마나 다른 생리적 기초 위에서 불안한 버그의 수많은 폭발 단추를 감추고 있는가를 어느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계절은 10월 하순으로 향하고 있었다. 뜨거운 한낮의 열기가 마지막 숨을 쥐어짜듯 붉은 노을로 서쪽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도시의 그림자는 점점 더 길어지면서 그 짙은 정서에 빠져들고 있었다. 초저녁의 싸늘함을 막아주지 못하는 얇은 외투에 대한 안타까움처럼, 부족한 열기로 채워져 있어야할 거대한 동공에 온갖 서정적인 감정이 넘치듯 흘러드는 것이었다.

나는 가만히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비록 20대의 파릇한 떨림이 전해오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나를 한번 가볍게 올려다보는 것으로 손쉽게 위로해 주었다. 이렇게 최초의 경계가 허물어지자 우리는 그 다음의 문턱에서 커다란 장애물을 만난 것처럼 잠시동안의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철조망에 장미 넝쿨이 울창하게 매달려 있는 폭이 좁은 보도블록 길을 걷다가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런데 미영씨는 어째서 화요일은 강의 시간이 틀리네요. 불편하겠어요.”

“마찬가지예요. 그 대신 오전 근무는 안하니까… 몇 시간씩 뒤로 밀렸다고 보면 되죠.”

“야간반은 주로 직장인 들이죠? 저희 쪽은 그런데요.”

“아,예… 그래요.”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나 울적하였기에 나는 그만 그녀의 손목을 놔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미안하다는 듯이 내 팔에 매달려와서 나는 잠시 당황스러웠다. 우리는 아직까지 서로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그녀의 짙은 아이섀도우의 이질감에 관해서 묻자 ‘단지 문화적 차이일 뿐이죠.’라고 넘지못할 선을 차갑게 암시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한 달 후 쯤에 재즈가수라는 그녀의 후배와의 술자리에서 그런 면면이 하나둘씩 늘어나는 것이 이해의 폭을 더욱더 확장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던 것이다.

그 후배 여가수는 이제 막 지방공연을 마치고 숨가쁜 하마와 같이 기름진 땀을 흘리고 뒤뚱거리며 맥주거품이 뒤덮인 채 놓여있는 우리의 테이블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산발한 파마머리는 폭탄에 맞아 터진 코미디의 한 장면을 떠올리듯이, 그러나 가까이 볼수록 섬세한 손질에 의한 강요로서 독특한 개성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수많은 형형색색의 모조 보석들이 일정한 패턴도 없이 마구잡이로 꿰어져 있는 2개의 목걸이가 서로 엊갈리어 옅은 분홍색 상의에서 심하게 흔들리거나 부딪히면서 심지어 소리까지 났다. 참으로 낮선 세계의 존재감이 공간을 휘젖고 일시에 나타나 다른 모든 평범한 것들과 확연히 구분되어졌던 것이다.

“이 사람이야? 언니, 내가 말했잖아, 사내는 덩치가 좀 있어야 한다고. 이렇게 약해빠진 사람은 힘들다고. 왜 내 말을 안듣지?”

후배가수는 완전히 나를 무시하고, 마치 무생물의 싸구려 도자기를 감상하듯이 쳐다보고는 짜증섞인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나의여자친구는 당황하여 두 팔을 허공을 향해 뻗으면서 진정하라고 타일렀으나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컴퓨터 기술자라며, 뭐 프로그래머? 암튼, 요즘 누가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그래? 나는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지지리 궁상을 떨면서 자기 만족에 사는 사람들이 기술자라고. 개뿔도 없으면서 잘난체는 또 얼마나 하는데. 언니, 차라리 공무원이 훨씬 낫다니까. 아니면 내가 지난번에 소개시켜 준 부동산 중계업자라도 한 번 더 만나봐라. 나, 정말 걱정되어서 하는 소리야.이제 언니도 편히 살아야 할 거 아니야.”

후배가수의 지나친 무례함에도 불구하고 나의 마음은 별다른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그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깃든 애정어린 울림이 나에게 소중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하나의 대상을 공유함으로서 나 스스로가 한낱 소품으로 사용되어지는 것을 기꺼이 용인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처럼 평온한 관대함은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영역의 감정으로서 나에게는 놀라운 것이었다.

술이 몇 잔 돌면서 의식의 경계가 모호해지자 후배가수는 조금씩 나의 담대한 마음으로 빠져들어왔다. 우리는 갑자기 친구가 되었고 의견을 교환하였으며 호기심에 찬 눈으로 서로를 탐구하였다. 후배가수는 끊임없는 질문의 포탄을 터트렸다. 나는 다소 방어적인 입장에 처하여 일반인들에게는 수수께끼와 같은 컴퓨터의 세계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저희 분야가 다소 차갑고 딱딱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강의시간에도 항상 조는 학생들이 있으니까요. 참 안타까운 일인데요, 그래서 저는 학생들에게 흥미를 불어넣기 위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잠깐씩 곁들입니다. 예를 들면, 신문지를 50번 접으면 그 두께가 얼마나 될까 하는 것이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깨 넓이나 양팔을 벌린 넓이 정도를 생각할 것입니다. 아니, 아니, 난센스 퀴즈는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수학적 정서를 뛰어 넘어야 합니다. 놀라지 마세요. 그 두께는 지구에서 달까지 거리보다 훨씬 더 두껍습니다. 정말입니다. 정확하게는 1억 1259만 킬로미터로 지구에서 거의 태양까지의 거리에 이르게 됩니다. 만약 이해가 잘 안되신다면 51번을 접었을 때 그 두께가 얼마나 될까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 두배가 되겠죠? 두배씩 늘어나는 수의 크기는 참으로 엄청난 것입니다. 컴퓨터에서 2진수의 독특한 성질도 이것과 동일합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16비트 컴퓨터가 신문지를 16번 접은 두께라면 32비트 컴퓨터는 신문지를 32번 접은 두께에 해당하는 데이터 유효 범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TV나 신문광고 등에서16차선 도로와 32차선 도로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정확한 설명은 아닙니다. 보다 근본적이고 기초적인 밑바닥에서부터 차원이 다른 가능성의 영역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죠.”

“신문지를 50번까지 접을 수 없지 않나요? 그렇지 않아요?”

나의 여자친구가 갑자기 정색을 하면서 물었다. 나는 약간 당황스러웠다.

“예,맞습니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죠.”

“어째서 추측만으로 그런 생각을 하나요? 그건 너, 너무 잔인하지 않아요?”

그녀의 얼굴은 오래된 식빵처럼 굳어 있었다. 그 차가운 눈빛은 맹렬히 뜨겁게 비난하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는 듯 보였다.나는 그 순간 시간이 정지하여 아득한 공간에 튕겨져 나간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리고 온몸을 떨게 만드는, 8년전의 실연의 악몽을 재현하는 작은 균열의 그 공포스런 조짐이 번쩍거리는 것을 보았다. 비록 억울함이 창자를 찌르는 듯한 고통 속에 갇혀있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었다. 때때로 여성은 단 하나의 무의미한 단어에서 수많은 각각의 또다른 해석적 가능성을 잉태하여 전혀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불가사의한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부모를 잃고 방황하는 유원지의 어린아이처럼, 온갖 애처로움이 무지개처럼 발산되어 알아봐주기를 간절히 희망하면서 조심스럽게 그녀를 응시하였다. 쉼표처럼 명확하고 짧은 호흡 속에 긴장의 끈이 매달려 있었다. 나는 그녀가 자신만의 사고에 단단히 갇혀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에 대한 정체성이 심각한 각을 세우고 있음을 느꼈다.

“언니, 진정해. 괜찮아. 아저씨는 그냥 업무에 관한 설명을 한 것 뿐이야.”

후배가수가 여자친구의 손등을 부드럽게 움켜쥐면서 말했다. 그것은 마치 지상에 유배된 살찐 천사의 우아한 목소리로서 언젠가는 나를 배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정도로 달콤한 것이었다. 후배가수의 풍만한 젖가슴은 터질듯한 아랫배의 깊은 주름과 어울려서 여성의 가장 원초적인 의미로 안타깝게 퇴화해 버리고 말았다. 나의 여자친구는 자신의 감정을 추스리며 울적한 마음으로 빠져들었다. 그녀와 맞닿아 있던 나의 오른쪽 어깨는 경직되어 공간을 둘로 갈라놓고 있었다. 맥주거품은 이제 더 이상 사라지고 없었다.

돌이켜보면 그날은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우리는 호프집을 나와서 택시를 타고 사당역 근처의 한 지하 노래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들은 나에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마치 액세서리처럼 가방에 매달고는 차에 태워 끌고 왔던 것이다. 나의 여자친구는 일반적인 수준의 정숙함을 단지 필요에 의해서 뒤집어 쓴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밑바탕의 신뢰에는 상당히 견고한 문화적 완고함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녀가 하늘색 셔츠의 단추을 풀어제치고 환호성을 지르며 뛰쳐나가서는 미친듯이 온몸을 뒤흔드는 광경을 목격하였을 때, 나는 어리둥절하여 세상의 모든 진실을 의심하게 만드는 참으로 낯선 공간에 갇혀 있다고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아저씨, 거기서 뭐해? 얌전 빼지 말고 나와, 얼른!”

후배가수가 나를 향해 소리질렀다. 짧고 강한 비트의 음악이 엄청난 굉음으로 벽면과 바닥을 진동시켰고 번쩍이는 섬광과 미러볼에서 뻗어나오는 수많은 불빛들이 온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